1. 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부정 당해서였습니다. (물론 이후에 글도 부정 당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글쟁이로서의 꿈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라이터였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은 '어린 애들이나 보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국내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는 별도로 없었고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영화, 드라마, 동화작가'에게 의뢰했다는 말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의 부재만 느꼈다는 관계자들의 경험담만 있었습니다.
사실 1960년~1990년 까지의 애니메이션은 영화만큼이나 시사성을 갖고 있었고 만화나 게임, 라이트 노벨 원작이 아닌 기획제작 되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 주인공(동물)이 다른 친구(동물)들을 이용해 비를 피하고 불을 피우고 민폐를 끼치며 자신의 이득만 취하는 개그 애니메이션은 현대의 아이들이 자기 밖에 모른다는 이기심을 풍자한 것이었습니다.
- 새끼 돼지까지 죽여 돈가스를 먹으려고 하자 마법으로 돈가스가 불독으로 변해 당분간 돈가스는 쳐다 보지도 않게 된다는 내용의 개그 애니는 육식에 치우친 식생활을 꼬집는 것이었습니다.
- 이외 유명한 개구리 왕눈이 같은 경우도 겉은 동화같은 만화지만 그 속은 권력에 관한 내용이라 잔혹합니다.
- 백상어의 경우는 주인공이 힘을 합쳐 백상어를 잡는 내용이지만 그 속 뜻은 백상어의 존재로 어부들이 굶주리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패전국 일본이 미국(백상어)을 물리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변화로 이런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죽었습니다.(극장용은 별도)
'만화책을 보는 불량학생'이란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듣던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만화는 '어린 애들이나 보는 것'이란 인식과 '어른이 되어서 봐도 재밌다'는 인식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 세대가 아이를 키울 때 애니메이션 패러다임 변화로 국내에 일본 애니메이션 붐이 일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방송국들은 기형적 수입 비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기형적 수입 비용이란 1화의 가격이 1이라 했을 때 2화는 1.1 3화는 1.2 이런 식으로 20화 쯤이 넘어가면 2~5 또는 그 이상을 요구하는 형식이죠.
국내에선 기형적인 수입 비용 때문에 국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전부 단발성 또는 실패했습니다.
예시로 국내 애니메이션은 '펭킹 라이킹', '녹색전차 해모수', '레스톨 특수 구조대', '날아라 슈퍼보드', '영심이', '달려라 하니', '태권왕 강태풍', '스피드왕 번개', '탱구와 울라숑', '검정 고무신', '영혼기병 라젠카', '채채퐁 김치퐁', '하얀마음 백구' 등등 다수의 작품들을 쏟아 냈지만 살아있는 콘텐츠는 하나도 없습니다. 추억으로만 남았죠.
2. 변화를 가진 이유.
이런 시장 상황을 깨닫고 영화와 라이트 노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0대 때에 이미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단발성으로 소설을 썼었고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생 땐 한 방속국에 정말 엉성한 미완성의 시나리오를 공모전에 제출했는데 반 년 정도 뒤 제가 썼던 극히 일부, 사고 과정에 대한 내용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방송에서 나오는 걸 듣고 '우연이겠지?' 라는 생각과 '두 번 다신 방속국 공모전은 안 낸다.' 라는 생각이 교차했었습니다.
사실 이 땐 바둑에 빠져있었는데 기보를 보면서도 가끔은 인터넷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찾아 읽고 시나리오 마켓과 공모전들을 봤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놉시스 심지어 트리트먼트만 거래 하는 사이트도 알게 되었었죠.(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때 느낀점은 '트리트먼트만 읽어도 이렇게 재밌다고?' 였습니다. 그렇게 언젠가 영화 시나리오를 쓸 날을 기다리며 정작 쓰는 건 소설을 씁니다. 이유는 영화계 구조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영화계는 흥행해도 작가가 아니라 감독과 탑배우, 투자처가 돈을 쓸어가는 구조. 작가는 5천 ~8천의 원고료만 받고 끝.) 영화계 구조 때문에 잘 써도 묻히고 감독이 작가와 동일 인물인 경우도 많습니다.
당시 쓰던 소설들은 10가지는 확실히 넘었는데 대부분 옛 애니메이션 기획의도에서 벗어나질 못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연과 마법사들의 싸움이었죠. 자연은 문화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마법사는 강대국, 문화 강대국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요와 농구를 미국 문화로 알고 있지만 실은 원주민들의 놀이를 훔쳐서 변형시킨 것. 이런 내용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었다.) 쓰기도 어렵거니와 재미도 없었죠. 대부분이 이런 것들이라 대량의 설정들을 버렸습니다.(하드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절필을 합니다. 그러다 군대에 다녀오고 (복무 중에도 전역 후 내가 쓸 글이 있을까? 싶어 여러 가지 형태의 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졸업 할 때가 되자 시간이 남았습니다. 사실 소설은 시간이 남아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읽는 것도 싫어하고 쓸 줄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있을 때 뭐라도 하고 싶어 아는 것도 없는 것들에 대한 시를 써서 공모전에 마구잡이로 제출 합니다.(이것들도 전부 버렸습니다.) 결과는 볼 필요도 없어서 확인도 안 했습니다.
이 도중에도 웹소설을 몇 번 써 봤는데 웹소를 전혀 모르기도 하고 필력이랄 것이 일기를 쓸 정도도 못 되어서 설정들만 만들어 냈었죠. 엄청 지웠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 걸 보니 이 때 가장 많이 글을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쓰고 버린 몇 가지 글들을 모아보니 100만자가 넘었있었습니다. 절필과 번복을 여러번 했고 게으름까지 부려 실제 글을 쓴 날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학교 졸업 전 까지 책도 거의 읽지 않았죠. 그보다 어릴 땐 더욱이요. 이렇게 적으니 글을 더욱 쓰기 싫어지네요.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자주 쓰지도 않으며 다량의 상상만으로 작품을 내놓는 작가님들도 드물게 계십니다.)
3. 그럼에도 쓰는 이유.
군대에서 소대장(소위)님이 글을 쓰고 싶어 하셨고 전공도 그 쪽이셨습니다.(돈 때문에 절필하시고 장교생활을 선택 하셨다.) 소대장님과 같이 군무가 있을 때 그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ㅇㅇ이는 글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에 "글은 그 사람의 분신입니다."라고 확신에 찬 소리로 답했었죠.(소대장님도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제가 상병이 되었을 때도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사실 그 땐 어렴풋이 글이 그 사람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글은 자식과 같다.'라는 말을 제 나름대로 변형시켜 받아들인 것이었죠.
20대 초반에 했던 '글은 그 사람의 분신'이라는 말에 글 쓰기를 완전히 놓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죽는 글들이 많고 버리는 시간이 많아도 결국 제 분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맑은 영혼을 갖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갖기 위해, 뛰어난 기술을 익히기 위해, 철학을 얻기 위해 우리는 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시간과 돈, 에너지, 스트레스, 기회비용. 따지기도 어려운 비용들입니다.
글도 마찬가지 입니다. 버려지는 수 많은 연습장과 문제집들. 열심히 했지만 성적(결과)이 좋지 않다고 포기하는 사람과 그것 또한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의 결과는 차이가 납니다. 물론 성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전 과정을 겪은 사람은 끈기와 집념을 얻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전 꾸준히 쓰지도 않습니다. 머리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이 정리되면 몰아 쓰거든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어차피 머리가 백지가 되어 설명서처럼 글을 쓰니까요.
이 한 마디가 하고 싶어 서론이 길었네요.
당신의 분신을 만드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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