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건 내가 떨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상담사에게 처음 했던 말.
오늘은 인간본성을 폭로하기 전에 하는 말.
초1, 8살의 난 담임이 잠시 자리를 비운 날 불을 껐다, 켰다 반복하며 장난치는 녀석에게 소리쳤어.
솔직히 난 상관없었는데 니들이 눈 아프다며 낸 짜증에 나섰던 거였지.
그 뒤로 담임은 이유 없이 날 때렸고 니들은 날 피했지.
담임은 그 이후로 매일 이유 없이 날 때렸고 애들은 날 얕잡아 봤지.
1년이 지나고 알았어. 장난치던 그 새끼가 담임의 아들이었다는 거.
그 때 겪은 일 중에서 내가 니들에게 극찬을 보내는 점은 뒤에선 날 집에 초대했다는 거야.
길도 모르는 곳까지 초대하고 데리고 놀다가 나 몰라라 버렸지.
덕분에 길을 잃은 적도 많았지만 어쨌든 집은 찾아 갔으니 괜찮았어.
근데 왜 앞에선 말도 못 걸면서 뒤에선 친한 척 하는 거야? 싸잡아 미움 받을까봐 무서워?
강약약강이 역겹다고? 그건 동물의 본능이야.
약자에게 강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약자에게 선의를 베풀 때마저 도덕적 우월감이 주는 자만심에 휩싸이는 가식쟁이들.
난 강약약강을 부르짖는 니들 때문에 강강약강이 되었어.
물론 약자는 착할 수조차 없다는 내 주관이 섞여있지.
그렇게 몇 년 지났어.
당연하게도 난 이후로 친구라는 건 그저 학급이 같은 놈들 정도로 여겼어.
인생 참 재밌는 게 그 중에서도 날 위해 내 대신 양아치에게 주먹을 내밀고 날 응원해주는 친구도 생겼지. 형 같았어.
문제가 있었다면 난 그런 좋은 친구를 옆에 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
여전히 인간을 혐오했고 삶에 가치를 못 찾았으니.
이후의 담임선생님들은 날 여자애들보다 조심스럽게 다뤘어.
숙제를 명분으로 감시가 목적인 일기장엔 평범한 글이나 썼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중학교에 올라가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지.
시간이 부족할 때 같이 혼날 수도 있는데 날 도와주었어. 그 친구는 여전히 곁에 있어.
당시의 여자애들은 내 피부색과 얼굴 크기와 목소리와 몸매에나 관심 가졌지.
“흰 우유 마시면 정말 하얗게 돼?”
“흰 우유 자주 마셔?”
“얼굴 작으면 화장품 적게 써?”
“화장품 뭐 써?”
“손으로 얼굴 가려봐.” (나보다 얼굴 큰 여자애를 놀리기 위해.)
이 따위 쓸모없는 대화에 말을 너무 안 해서 목소리만 들으면 대학생으로 오해 받던 당시의 난 대충대충 이었어.
2학년 누나들을 지나칠 땐 “하야면 빨고 싶다.”는 말이 들렸지.
그래서 난 백인에 환장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게 일찍부터 놀랍지 않았어.
그들도 모두가 보고 있을 땐 단순히 “귀엽다.” 라고 애기 취급하거나 2학년 형들은“이리 와 바.”라며 겁 준 게 전부지.
한 선생님은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내 짝궁이 얼굴을 노트로 가리고 있단 이유로 날 가해자로 생각했었지. “무슨 짓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러니 애들에게 날 고발하라는 듯 물어봤지.
아무것도 안 나오니 그제야 짝궁에게 잔소릴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만 관대함을 버렸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이미 ‘나이만 처먹은 애새끼’들이 많다는 걸 알았기에 별 신경 안 썼어.
내가 본 바로는 왕따 당하는 녀석들은 하나 같이 다 이유가 존재했어.
어른이 된 니들은 이런 말 하는 날 쓰레기 취급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싶겠지.
근데 그거 알아? 왕따 시킨 건 니들이고 침묵한 것도 니들이야.
니들처럼 침묵하니 세상 참 편하더라?
어른이 된 후로는 보는 눈과 평가가 무서운지 어찌 그리 세련되게 포장하니?
사실 나도 왕따랑 다를 바 없었지.
유일한 차이점은 무시당하지 않는 다는 것 정도였어.
그럼에도 내 외관은 무시당하기 좋았는지 웃어주면 기어오르려고 했지.
뭐 적당히 눈치 있는 애들이 알아서 말리니 내가 화 낼 일은 없었지만.
군대에서도 일병 때 병장의 폭로를 준비하면서 후임 새끼가 지껄였지.
“혼자 총대 메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 8살 때 한 병신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한 거야.
그 병장은 선임들의 부조리를 못 참고 도망쳤으면서 우릴 더 심하게 괴롭혔지만 난 알아서 더욱 잘 해주었어.
‘독이 든 호의’ 그게 내 포석이었지.
그 새낀 아직도 자기를 고발한 게 나인 줄 전혀 몰라.
전역하기 전엔 휴가를 전부 자른 나에게 미안했다며 악수까지 청했어.
내가 인간 본성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가식으로 자신마저 속이는 너희들은 내 말을 ‘이상한 말’, ‘궤변’ 취급했어.
상처 없는 것들은 어찌 그리 이기적인지 자신의 상처를 보이지 않으면서 타인의 상처는 들춰보지.
그러면서 정신병 환자를 가해자 취급이나 하지.
니들은 약자에게 한 없이 강하니까.
상처 받아도 사람을 믿는 내가 비정상일까?
작은 상처도 못 보이면서 자신의 가해는 숨긴 채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는 니들이 비정상일까?
내 친구 중에 표현을 잘 못하는 친구는 있어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어.
약자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피해 받았다고 지껄이는 니들이야말로 ‘궤변론자’야.
15살의 난 ‘모든 선은 위선’이라는 생각에 잠겨있었어.
사회에서 이미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거든.
근데 이런 내 생각에 모순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있지.
이름도 얼굴도 밝히지 않고 나눔을 실천하는 진짜 위인들.
난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 생각에 구멍을 인정하지.
니들처럼 포장이나 하지 않아.
예술의 울타리 안에선 정신병은 천재에게 영감을 주는 친구로 여겨져.
너희들은 외적인, 표면적인 것으로 자신을 규명하고 꾸미면서 생활하지만 상처받은 사람들이 보기엔 코웃음거리도 안 돼.
건강하게 자라 약자를 깔보고, 약자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정상인.
미숙아로 태어나 지진아로 자라 죽고 싶은 감정과 싸우는 나보다 인간으로서 나은 게 뭐야?
내가 사상가의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공감인데 니들은 뭐 때문에 배우려는 거야?
평생 책이나 읽어. 그게 남한테 보여 주기 좋잖아.
책에 들어있는 지식은 늙지만 사색으로 얻어 낸 지혜는 영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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