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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일기(일부비공개)

19. 우울증 일기 - 친절을 베푸는 건 기쁘다

by 스토리대전 2021. 3. 25.

오랜만에 외출이다.
철도 적성검사를 위해 멀리까지 가야했다.

아침에야 잠이든 난 3시간 정도를 자고
밥 대신 커피와 에너지바만 먹고 집을 나섰다.

의왕역까지 가던 1호선엔 낮 시간이라 그런지
대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마냥 부럽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러다 꽤 멀리가서 한 아주머니가 철 손잡이 부분에

머리를 대고 꾸벅꾸벅 졸고계셨다.

졸고계신 그 분 쪽에 출입구가 열리고 많은 손님들이

내리고 타고하니 잠이깨셨는지 반대편으로 가서

다시 눈을감고 벽에 기대셨다.

 

23살 무렵.

군대를 막 전역하고 학교에 과제에 토익학원까지

다녔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나 잠이 부족했었는지 불면증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서서 잠에 들었다.

 

새벽 6시에 현관을 나서고 집에오면 항상 11시였기에

과제까지 하면 거의 2~3시에 잠들었던 때였다.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그러다 내 엉덩이를 수십초간 빚고 간 늙은 성추행범 할망구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서서 자다간 어떤 일을 겪을 수 있는지 잘 알기에

난 자리를 양보하러 일어났다.

 

사실 양보하고는 싶었지만 아주머니께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난 대인기피증에 우울증, 공황까지 겪고 있기에 혹시나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렵지만 두려워 양보도 못하는 날 바꾸고 싶었다.

내릴 차례는 아니지만 난 일어나 그녀의 옆에서서

백팩 어깨끈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가까이서보니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키는 나와 비슷하고 옷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마스크 위로 어린 얼굴이 보였다.

게다가 생각보다 미녀였다.

 

"저기 앉으세요."

 

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녀는 손사래만 살짝 흔들었다.

손사래와 같이 말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때 그녀는 에어팟을 끼고 있었고

난 칼국수 이어폰으로 나카시마 미카의 -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것은을 듣고 있었다.

마스크도 끼고 있어 입모양을 볼 수도 없었다.

왼쪽 이어폰을 빼고 다시 말했다.

 

"앉으세요."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난 손짓으로 얼른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내리세요?"

"아뇨, 어차피 곧 내려서요."

 

그제야 그녀는 마스크 위로 환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는 내가 앉아 있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내 옆에 앉아있던 학생으로 추정되는

친구가 자리를 옮겨 앉아있었다.)

 

그녀가 웃으니 예뻐보였다.

물론 원래 미인인 것 같았으나 양보하고도 불미스런 오해를

받지 않을까하는 내 두려움에 미소와 감사로 답해서인지

웃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그 웃음에서 싱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웃을 때 피부를 봤을 땐 나이가 많아봐야 20대 초반이나 초중반으로 보였다.

난 이제 20대 초반의 여자를 볼일이 없었기에 확연한 차이를 바로 잡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불편하게 잠을 청했고 난 20여분을 더 가서 내렸다.

 

이제 시험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초행길에 시간도 넉넉하지만은 않아 조금씩 뛰었다.

저질체력 때문인지 벌써 힘들었다.

시험장소도 잘 몰라 물어물어 가다보니 도착했을 때엔 마지막 인원이 들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지각은 면했다.

 

난 5만원을 내고 적성검사를 받았다.

굉장히 지루했던 것도 있고 어려웠던 문제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통과는 했다.

했는데...

 

시험 기기

능력검사는 전부 통과했는데 심리검사에서 낙제했다.

시험관은 내가 너무 솔직하게 써서 떨어진 거 같다며 긍정적으로

대답을 바꿔보라고 하셨다.

 

그리솔직하게 쓰지 않았는데.. 우울, 불안장애 판정이 나왔다.

다행히 이 경우 600문제가 넘는 재검사(소요시간1시간)를 통해 통과가 되면 합격이다. (본검사는 몇 문제 안된다.)

그렇게 난 시험관분과 둘만 남아 성격검사를 다시 진행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난 이런 검사에서 능력부분보다 항상 성격부분이 맘에 걸렸다.

분명 이게 제일 쉬웠던 적도 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안타깝다.

 

 

워낙 시간이 오래 걸려서 끝나고 지하철을 향하니 퇴근시간이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퇴근시간인데 사람이 생각외로 출근길

러시아워의 지하철과 유사했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집에 가던 중 얼마나 왔는지 확인해보니

다음 역이 영등포역이었다.

 

몇달 전 날 차단해 연락이 끊겼던 아는동생의 일터다.

6시 50분. 10여분만 늦었어도 지하철에서 마주쳤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가 7시 퇴근이라는 걸 알고있었다.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먼저 아는 척 하고 자리를 양보한 뒤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시간 때문인지 예상대로 마주치진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노래방에 가려 했었는데 막상 오니 진이 빠졌다.

정말 체력이 말이 아니다.

 

노래방은 못갔지만 컴퓨터를 켜니 메일이 하나 보였다.

친구가 스팀게임을 선물했다는 내용.

덕분에 기분은 좋다. 이제 같이 하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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