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울증일기(일부비공개)

20. 우울증 일기 - 우울증 친구 이해할 수 없는 이유

by 스토리대전 2021. 3. 26.

한낮의 햇빛 때문인지 불쾌하게 일어났다.

정신이 다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울증 : 일어나기 싫지? 누워있어.

우울증 : 씻고 밥 먹어도 할 일도 갈 곳도 없잖아. 오늘 안 씻어도 상관없잖아.

우울증 : 어차피 아등바등 노력해서 뭘 이룬다 해도 그 속에서도 괴롭고 외로워.

 

나 : 이제 깼어.

 

우울증 : 깨어나도 침대에서 일어나려면 6시간은 족히 필요하잖아.

우울증 :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었고 오늘도 똑같아.

우울증 : 그냥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거지. 달라진 건 없어.

 

나 : 그런 거 같기도 해.

 

우울증 : 내일을 바꾸려고 할 필요 없어.

우울증 : 어차피 죽으려 할 거잖아?

우울증 : 의지할 곳도 희망도 없으면 죽으러 갈 거잖아. 

 

나 : 그때를 준비해야 하지 않아?

 

우울증 : 달라지는 게 뭔데? 시간이 지나서 곁에 있는 사람이 바뀌어 가는 거?

우울증 : 그때까지 시간을 버텨서 뭘 할 건데? 지금과 다른 게 뭔데?

우울증 : 태어나 세월을 느끼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도 뭐가 남지? 어차피 넌 살면서 행복하지도 않을 텐데.

 

나 : 가슴이 아파.. 울고 싶어. 숨쉬기 힘들어.

 

우울증 : 거 봐, 울고 싶잖아. 

우울증 : 사지가 멀쩡해도 누워서 울기만 할 텐데 뭐하러 일어나.  

우울증 : 그런데 너 이젠 웬만큼 슬픈 걸론 느낌도 없잖아. 어떻게 울려고?

 

나 : 내가 목을 매는 상상, 내 몸에 불 지르는 상상. 그러면서 죽는 상상.

 

우울증 : 그런 상상 지겹지 않아?

우울증 : 어차피 죽으면 곧 사람들에게 잊힐 뿐.

우울증 : 네가 아무리 고통스럽게 죽어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아. 네가 의미 있게 죽어도 마찬가지고.

 

나 : 기억에 남고 싶어서 그런 건 아냐... 슬퍼하는 사람 볼래.

 

우울증 : 그렇게 울었으니 꾸며진 영화나 노래로는 안 되겠지. 

우울증 : 이제 그 눈물도 안 나올 때가 된 것 같네.  

우울증 : 가까운 사람이 괴로워 혼자 목숨을 끊었네.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친구를 보는 거야? 죄책감도 느끼고?

 

나 : 어..

 

우울증 : 실컷 울어. 

우울증 : 너도 알 거야.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라 가는 느낌.

우울증 : 그래, 내 말대로잖아. 오늘도 누워서 울기만 하네.

 

나 : 울면 좀 나아져. 

 

우울증 : 오늘은 버려진 느낌은 안 들었나 봐?

우울증 : 어차피 무력감 아니면 버려진 느낌이나 받잖아.

우울증 : 솔직히 오늘도 깨기 싫었지?

 

나 :... 누워있을래.

 

우울증 : 잘 생각했어. 누구와 얘기해도 민폐잖아.

우울증 : 어차피 이런 얘기 다른 사람들한테 해봤자 버려질 거 잘 알지?

우울증 : 마음껏 울고 있어.

 

나 : 울고 나면 힘이 나겠지..

 

우울증 : 힘낼 필요 없다니까. 그렇게 말했잖아.

우울증 :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공해도 행복하진 않을 거야.

우울증 : 일어나게 되면 커피나 마시는 게 어때? 필요하면 소주도 사 오고.

 

나 : 알아서 할게..

 

우울증 : 자신 없는 게 보여. 솔직히 두렵잖아. 실패해서 또 세월의 흐름이나 탓하려고?

우울증 : 아무것도 안 해서 실패하는 거랑 뭘 해서 실패하는 거나 똑같아.

우울증 : 뭣하러 고생해서 실패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

 

나 : 이젠 혼자 있고 싶어.

 

우울증 : 뭘 생각하려 해? 아무도 안 봐주는데 청승이나 떨려고?

우울증 : 할 일이라곤 불도 안 킨 집에서 벽에 기대 서서 멍이나 때리는 거잖아?

우울증 : 그러다 좀 죽여달라고 중얼거릴 거고. 죽을 고통도 못 견디면서 말이야.

우울증 : 그래서 넌 내가 필요한 거야.

우울증 : 좀 현명해져.

우울증 :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 그래 봤자 이런 얘긴 꺼내지도 못해.

우울증 : 실수라도 꺼냈다간 넌 그 사람에게 부정적 에너지나 주는 착취자야.

우울증 : 서로 마이너스야. 넌 버려지는 느낌, 그 사람들은 착취당하는 느낌.  

우울증 : 너도 느꼈잖아. 그만 좀 하라는 신호. 눈치채도 눈치 없게 행동하면 눈치 없는 거야.

 

나 : 그래도... 도와달라는 신호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도 있진 않을까.. 

 

우울증 : 그딴 식으로 도와달라는 신호를 누가 알아채?

 

...

 

우울증이란 친구는 내 속 깊은 얘길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친구다.

그런데 이 관계엔 문제가 있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것, 내게 도움이 안 된다는 친구라는 것, 이 친구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절교하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