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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살면서 사회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by 스토리대전 2021. 4. 10.

난 가난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예근성이다.', '배가 덜 고파봤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 노예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타인의 것을 탐하기만 하는 게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경영에 성공한, 투자에 성공한 사람들의 부를 일부 받고 싶다는 욕구가 담겨있다. 

부자들을 따라가려고 자본을 공부하는 사람이 노예인지 부자들의 콩고물이나 바라며 사는 게 노예인지 따져볼 필요도 없다. 부자들의 돈으로 먹고 살길 바라는 그들은 노예 또는 도둑이다. 

 

유튜브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학점을 나누어 줄 것인가?'라고 묻는 영상이 있다. 많이 가진자가 당연히 적게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면서 역설적이게도 자기 성적을 나누어주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스스로 노력한 학점을 공부도 안 하고 출석도 제대로 안 한 학생에게 나누어 줄 순 없다.

그런데 그들은 경영자와 투자자들을 '악'으로 묘사하고 욕한다. 왜 '악' 인지를 물으면 많은 돈을 노동자와 같이 벌었는데 노동자에게 주는 돈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필자도 여기에는 일부 동의한다.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명하게 빈부격차, 소득격차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많은 부분들이 결여되어 있다. 현재 그들의 주장은 자본가를 나쁜 사람으로 보며 경영자를 욕만 할 뿐이다.

 

단순히 경제의 원리만으로 놓고 보아도 노동자의 인건비는 상승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영능력이 있는 사람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 그 수가 적고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자본가는 상대적 소수이다.

일자리, 돈을 벌 수 있는 자리는 누구나 원하는 재화다. 한정된 재화이기 때문에 희소성이 있다. 그런데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당연하게도 임금을 낮춰도 비슷한 능력을 지닌 인재들이 달려든다.

싸게 살 수 있는 가게들이 많은데 굳이 비싼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 없듯 경영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비용을 줄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의 노동력을 물건사듯 임금을 무조건 내릴 수도 없다. 임금은 그 사람의 생활수준에 직결되는 문제다.

일할 사람이 많으니 월급을 50만원만 준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저임금법이다.

 

그러나 '최저임금법으로 보호받고 있으니 불만 갖지 말고 일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자본주의를 학생들이 받는 성적에 비유했는데 사실 이 비유는 적절치 않다. 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끼리 경쟁하는 것은 펜스(울타리) 안에서의 경쟁이다.

 

같은 수업,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경쟁한다. 졸업생과 경쟁하지도 수업을 수료한 학생과 경쟁하지도 않고 다른 학교 학생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제한된 시공간의 울타리 안에서 경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엔 이런 울타리가 없기에 '우루과이 라운드'나 'FTA'에서도 예외 항목을 지정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스크린쿼터제다. 우리나라 영화가 할리우드에 비해 영상의 질이나 내용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 스크린쿼터제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 영화계는 현재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스포츠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축구, 농구 전부 외국인 용병선수를 넣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국내 선수들을 육성시키기 위함이다. 100% 외국계 용병 선수를 쓸 수 있다면 국내 스포츠계는 지금보다 유명한 선수가 덜 나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개인에겐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경쟁, 거래에서는 울타리가 있지만 개인에게는 이런 울타리가 없다. 부유한 집안에서 해외 일류대를 나온 사람과 국내에서 학자금 대출을 끼고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학교를 다닌 사람이 경쟁해야 한다. 거기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끼리만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사업에 몇 번 성공을 했던 사람, 이미 투자의 키를 알고 있는 사람, 사업을 실패했어도 경험이 있던 사람들과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과 경쟁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여성 할당제, 비례대표, 지역 인재, 공무원 자녀, 장애인 등 여러 분류로 나누어 경쟁을 시킨다.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수평적 평등이 무한경쟁이라면 결과적 평등은 제한적 경쟁이다. 물론 여기서 오는 부작용이 수평적 경쟁을 하는 사람들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남성이자 비장애인이다. 사는 곳도 서울이다. 서울에서 가난하게 살았기에 경쟁에서 어떤 울타리도 없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들보다도 경쟁에서 불리했다. 나는 어떤 울타리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결과적 평등을 위한 울타리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게 자본주의의 부작용(사이드 이펙트)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불만인 것은 본인을 지켜주는 울타리는 옳은 것이고 타인의 울타리는 부정, 부패라며 욕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내로남불, 이중잣대를 들이미는 사람이 대다수다. 절대다수가 이중잣대를 들이민다. 여성에게 결과적 평등에 대해 말해주었더니 '그딴 게 왜 있냐?', '불공정하다.'며 욕하면서도 결과적 평등의 대표가 여성할당제라는 것을 설명했더니 그건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이라며 태세를 전환해 역겨운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들은 자신과 많이 다른 의견을 내던 비례대표의원도 욕했다. 비례대표 제도 같은 게 왜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했다.

 

자본주의 국가에 살면서 부자들의 돈을 탐내기만 하는 이들은 그 의견을 존중받고 싶다면 이런 울타리의 필요성과 적합성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남들이 버는 돈을 나누어 달라고만 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탕만 더 달라는 5살 아이와 다를 게 없다.

 

개인에게도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수능시험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수능 성적은 수험생, 재수생, N수생들끼리만 경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경쟁은 수험생과 대학교 재학생, 대학 졸업생, 대학원생, 박사, 고졸, 중졸까지 전부 울타리 없이 경쟁을 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결과적 평등이다. 이런 주장 없이 성공한 사람의 노력을 착취라 평가절하하며 그들의 돈만을 탐내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성할당제나 지역인재 할당제 등 이런 울타리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사실 이런 울타리도 자본주의가 가진 부작용(선수필승, 자본의 대물림)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임시방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욱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우리 사회는 이런 울타리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고위직 공무원, 선출직 공무원(대통령 및 국회의원 등)들 자녀의 비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오늘 주제에서 멀어질 것 같아 언급하지 않고 여기서 마치겠다.

 

정리를 하면 자본주의는 분명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부작용을 우리 사회는 아직 완전히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안에서 해결방법으로 부자들, 성공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부담시키고 일자리와 학교를 위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도 임시방편이라는 것. 그중에 부자들을 악이라며 본인들이 착취당했으니 돈을 더 내놓으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주장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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