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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일기(일부비공개)

17. 우울증 일기 - 내가 5살에 겪은 것.

by 스토리대전 2021. 3. 14.

5살에 보통 애들은 뭘 겪었을까?

무슨 얘길 듣고 어떤 동심을 갖고 살았을까?

나에겐 없는 추억이다.

 

난 5살에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게 다다.

물론 난 사생아가 아니다.

사생아가 아닌데도 아버진 날 고등학생까지도 사생아로 의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머니가 날 낳을 때 스트레스를 받아 내 피부가

온통 까맣게 태어나 못생겼던 것이다.

물론 피부색은 크면서 하얀색으로 변했지만

날 사생아로 의심하는 건 여전했다.

 

내 쇄골이 심하게 비대칭인데 이건 아마

계단에서 아버지가 날 안고 있던 어머닐 때렸을 때

어머니가 날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강하게 잡으셨을 때

그렇게 된 것 같다.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아도 이미 쇄골이 비대칭이 되어있었으니.

그 이전 나이에 일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7살엔 애는 섹스하다 실수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8살엔 상에 앉아 저녁을 기다리던 우리 형제에게

손에 못을 망치로 박아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 그냥 아무말 없이 앉아있던 것 뿐이다.

그 전 날에 밥 차릴 때 앉아 기다리지도 않는다고 혼났기에

다음 날 앉아있었더니 들은 소리다.

 

10살 땐 콩나물국을 먹는데 그 소리가 시끄럽다고

학교가기전 회초리를 맞았다.

그 스트레스로 아직도 먹을 땐 씹는 소리에 신경쓴다.

날 몇번 안 본 사람도 내가 불편해 보였는지

왜 그리 불편하게 먹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식구들 머리를 실로폰 삼아 술김에 두드리고

항상 폭력적인 분위기에 위압감.

일도 안 하고 술만 쳐먹고 때리고 욕하고

아내, 큰아들, 작은아들의 돈 까지 훔쳐가면서 술사먹는

쓰레기를 난 죽일 자신 있다.

 

어릴적엔 혹시라도 실수로라도 사람을 죽이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당연히 죽일 수 있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그 새낄 죽이고 싶어진 이유는 술이다.

너무 소심해 술처먹기 전엔 선비처럼 굴다가

술만 들어가면 본성이 나온다.

 

그런데 그 술을 먹고 본인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끌어가려한다.

술에 사람이 개가 되어도 본인이 유리한 기억은 전부 한다.

아니 정확히는 불리할 게 없는 기억은 전부하고

불리한 기억은 전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유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게 난 웬만큼 술에 취해도

내가 했던말과 상대방이 했던말들을 기억한다.

필름이 끊겼다 돌아왔다 할 때의 기억도 끊기지 않은 부분은

전부 기억한다.

그렇기에 기억이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라는 걸 확신한다.

 

난 정말 죽이려다가 눈만 실명하게 만드려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당시 나이가 26살. 내가 너무 아까웠다.

20년 넘게 피해자로 살다가 한 순간 보복으로

범죄자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너무 분했다.

 

하지만 감정이 올라오면 지금도 죽일 수 있다.

말리는 사람도 전부 죽일 수 있다.

중학생 때 이미 사람이 싫다는 소릴 뱉어댔고

20살 후반엔 삶에 미련이 사라졌다.

 

지금도 그냥 죽어도 별 미련없다.
누군가에게 당해 죽게된다면 확실히 보복만 하면

난 죽어도 별 상관없다.

 

사는 것에 미련이 없다보니 사후세계도 다음 생도

전혀 관심없고 오히려 1번 사는 거니까 재밌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방금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살인미수 고소 상담을 받았다.

(물론 내가 죽이려던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난 군에 있을 때라 정확한 정확도 모른다.

공소시효는 유효하지만 재판이 어려울것은 뻔하다.

 

그 때 신고를 했어야 했는데.

물론 난 휴가를 나오기도 전의 일이라 신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꿈속에서도 죽이고

일어나서도 그 새낄 죽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때가 있다.

 

덕분인진 몰라도 무례한 이웃들에게 한 치의 망설임없이

공격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왜소한 체구에도 그들은 함부로 화를 내지 못한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인지했거나 

아니면 내 눈을 보고 상종하기 싫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나 괴롭히던 양아치 새끼들도

이미 중학생때부터 난 건들지 않았다.

아마 화났을 때 내 눈과 참지 않을 때 행동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중학생주제에 다른 중학생을 보면서 싸움을 잘해봤자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 였다. 복싱을 배우던 싸움을 잘하던

그래봤자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이었다.

 

난 이미 죽음에 대해 1달이 넘게 깊은 고민을 하던 나이었기에

폭력이 그리 무섭진 않았다.

신경쓰이는 건 학교 내의 처분과 평판 정도.

싸움자체는 무섭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잘 싸워도

난 계속 보복한다. 당일이 지난다면 내일, 모래 계속 보복할 뿐.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때 딱 1번씩 내가 보복한 상대들이 있었기에

그 뒤론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친구도 반반.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절대

건드리지 않는 날 무서워 하는 벌레 반.

보복은 했어도 내가 더 착하다며 믿고 친하게 지내려는 반. 

 

고등학생 때 싸움을 제일 잘 한다고 소문난 놈과도 시비가 붙었지만

결국 3년동안 직접 날 건드리진 못했다.

아는놈들을 시켜 은근히 시비는 걸었지만 시비라 해도

길 가다 어깨를 조금 부딪히는 것 정도.

물론 정도가 지나친 놈한텐 보복했다.

 

그 새낀 내가 또라이라 건드리기 싫다했지만

난 거기서 그 놈의 겁을 읽어냈다.

하루는 학교에 일찍와서 내 책상에 음료수를 뿌리려 했지만

멍청한 대가리 탓인지 내 앞 책상에 뿌려놓았다.

싸움에 미쳐있던 새끼도 결국 내 앞에서

날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새끼랑 조금 친했던 녀석도 오히려

날 더 멋있게 보았다.

싸움 잘하는 새끼 무서워하지도 않고 부당하면

욕하거나 덤비니까.

 

물론 날 화나게 했으면 다음 날이든 당일이든 보복했을 것이다.

상대가 죽든 살든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당연히 내가 죽어도 상관없었을 때였다.

 

그렇게 벌레들에게 화를 주저없이 내다보니

난 화내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바로 화를 낼 수도 있고 화가 난 채로

조목조목 다 따져서 상대가 병신이란 걸 설명할 수도 있다.

 

본인이 억울하다고 주말내내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아줌마.

남의 집 창문 안쪽으로 폐수를 버리는 할아버지.

술 처먹고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던 할아버지.

남의 집 밑에서 담배 피는 남자.

내 앞에 지나가며 담배피우던 돼지새끼.

남의 집 옆에서 새벽 1시부터 3시 가까이 마이크에

떼창 부르던 연극연화과 벌레새끼들

전부 안 참고 할 말 다하거나 신고했다. 

 

요즘엔 화가나면 죽어도 상관없고

누굴 죽여도 상관없다고까지 생각이 든다.

 

강약약강이라고 비난하겠지만 난 그렇게 선택적 분노가 아니다.

나보다 강하든 약하든 날 미치게 하는 것을 없애려는 거다.

그보다 나보다 약한사람은 거의 없다.

살을 일부로 찌우기 전엔 저체중이었고 지금도

간신히 정상체중에 어렸을 땐 병에 걸린 시간이 더 많았다.

 

내 얼굴 보고 선한 범생이니 편하게 살았을 거 같으니 그딴 말

하는 놈들은 내 삶의 어느정도나 버텼을지 궁금하다.

나보다 어려운 상황인 사람도 많은 건 알지만

얼굴만 보고 타인의 과거를 판단하는 인간들이

제대로 된 고생을 해봤을리 만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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