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난 '눈치가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초등학생, 눈치가 없는 게 정상일 나이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 때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은 그저그런 일상의 느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말을 들은 이유는 그저 '어른의 어리광'이라 생각한다.
난 눈치만 없는 게 아니었다.
눈치보며 살기 싫은 어린아이였다.
지금도 확신, 신념이 있다면 타인의 눈치는 안 본다.
논쟁이 될만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자. 자신있다.' 라고 했었다.
져주거나 맞춰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만 하니
나도 그들에게 맞춰주지 않았다.
난 눈치를 보아도 눈치보며 살기 싫다는 말에 확신있다.
꽤 어릴적부터 특정상황에서 타인의 표정을
관찰하는 게 하나의 재미었다.
보통 어른들이 윽박지르거나 화를내면
아이들은 공포에 얼어버리거나 화를 내는 어른에게만 집중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느낀 건 중학교 1학년.
평소와는 다른 성교육시간.
이 시간에 난 반 아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남성의 성기를 보여줄 때와 여성의 성기를 보여줄 때의
아이들마다의 집중력과 딴청을 읽어냈다.
또 당시 고등학생 누나들의 선정적인 춤을 보게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옆에 앉아있는 남자애들의 동일한 표정이 15년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먼지가 날리는 곳에서 코가막혀 평소에도 입으로 숨을 쉬는 나보다
더욱 크게 입을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일행으로 쭉 보였다.
웃겼다.
포르노, 말초신경 자극, 중독, 분노.
이런 극단적인 자극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반응
같은 표정, 같은 감정을 갖게 되는 거 같다.
그런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들은 재밌다.
반대로 거기에 빠진 사람은 재미없다.
하나같이 똑같고 다름, 개성이 없다.
내가 읽는 건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보다 먼저 읽은 거 개였다.
난 개를 키우며 개의 의사를 읽어냈다.
처음엔 당연히 간단하고 쉬운 것들이었다.
개들은 언제나 사료, 간식을 원한다는 것.
개들이 문을 긁는 다는 건 문을 열어달라는 것.
내가 물을 사용할 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건
목이 마르다는 것.
이렇게 간단한 것들이었다.
성인이 되서는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아니지만
그 강아지의 다른 의사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강아지가 쇼파위에 앉아있었고
난 그 밑에 다른 가족과 앉아있었다.
그런데 강아지가 불편한 듯 낑낑댔다.
간식도 물도 화장실도 항상 준비되어있었기에
처음엔 놀아달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강아지는 놀이에 집중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는 내가 자신의 뜻을 읽지 못하자 내 물건을
발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내 핸드폰을 발톱으로 긁고 모자를 코로 밀어 떨어뜨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궁금했다.
난 여러시도를 해보았다.
다른 장난감을 주고 간식도 가져다 주었다.
예뻐해주기도 했지만 다 귀찮아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혹시?'라는 마음이 생겼다.
난 강아지 옆 자리 쇼파에 앉았다.
그제서야 강아지는 만족하듯 코를 들이대며 내 존재를 확인했다.
간단한 것이었다.
자기보다 서열이 밑이라고 여기는 가족과
자기와 서열이 비슷하다고 여기는 가족이 같은 높이
똑같이 자기보다 밑인 쇼파 밑에 있으니 견딜 수 없던 것이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는 아니지만 자주 보다보니
이런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사람은 읽기 더 쉽다.
나도 사람인지라 동물보다 사람과 있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읽을 수 있는 정보도 동물보다 많다.
표정, 말투, 말수, 말의 속도, 몸짓.
그런것들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표정과 말투는 상대적으로 눈치채기 쉽다.
말의 수는 평소보다 2, 3마디 적거나
말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건 눈치채기 어려운 부분이다.
몸짓의 경우도 보통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자주 보다보면 알 수 있다.
10년, 20년이 아니다.
난 회식하자고 했을 때 대리의 반응을 보고
그 대리가 회식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데 겉으로만
얼른 하자고 말하는 걸 느꼈다.
당시 난 회사에 8개월 정도 다녔던 상태다.
그렇게 느낀 건 평소에 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회식을 하자면 오히려 기뻐하는 척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데려가려고 궁리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그 대리는 상사들 때문에 겉으로는 간다고
하면서 기대하는 척 했지만 연기였다.
그 연기를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회식자리에서
대리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넘겨짚는 게 아니다.
대리가 다른 회식자리에서 왜 다른 회식 얘길하냐고 묻길래
"그 회식 가고 싶어하시지 않는 거 같아서요."
라고 답하니 그녀는 놀라며
"내가 너한테 말했었나?" 라고 물었다.
난 고개를 가로로 천천히 저으며 "아뇨."라 답했다.
물론 이전엔 과장의 다름도 읽어서 퇴근하다가
돌아가 과장과 둘이 회식을 한 적도 있다.
그의 다름은 노골적이었다.
평소엔 항상 칼퇴였지만 그 날은 일도 없는데 앉아있었다.
다른 직원들도 전부 회식 권유를 거절하니 혼자 회사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어 난 퇴근길을 돌려 다시 회사로 향했었다.
가족의 경우는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고등학생 때부터 어른들이 원하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돈이나 자식자랑 같은 너무 쉬운 것 말고.
당시 햄버거를 자식, 조카인 우리에게만 사주고
더는 안 사셨지만 드시고 싶어하는 눈치였기에 형에게 전했다.
물론 햄버거를 비싸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다.
소고기도 사주시고 비싼 식당에도 자주 데려가주셨지만
먹고 싶어도 참으신 이유는 어른들끼리의 눈치였다.
역시나 햄버거를 양보하니 두 분 모두 잘 드셨다.
이런 것 말고도 전화통화만으로 아버지가 지금 술을
시작한지 얼마나 됬으며 술의 종류는 대충 이런 류.
평소와 다른 류. 라는 것을 때려 맞출 수 있었다.
목소리의 톤. 전화한 시간. 전화 내용. 코가 막힌 정도.
이런 정보로 읽어냈다.
5분 내로 집에 가 확인하니 술의 종류와
몇 잔 째인지도 정확했다.
물론 찍은 것이지만 나름의 정보로 추리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는 이유는 최근 인간관계를 정리하면서다.
사람은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책이 별로라면 읽지 않을 것이다.(겉으로만 만나는 인연.)
그 책이 매력 없거나 앞부분만 봐도 예상이 된다면 금방 버릴것이다.
(조금 알아봤지만 나와 안 맞는 인연.)
책이 나와 다르지만 배울 게 많다면 곁에 둘 것이고
(자주 연락하진 않지만 끊지는 않는 인연.)
책이 맘에 들어 몇 번씩 읽는 책은 계속 옆에 둘 것이다.
(오래된 친구나 배우자.)
책이 적당히 마음에는드나 너무 방대하거나 생소해 아직도 다 읽지 못한 책.
(무슨 생각인지 그 사람을 잘 모르겠으나 다 알고 싶지도 않고
작정하고 파고들면 다 알 것 같은 사람.)
그 중에 가장 좋은 책(인연)은 최신이다.
책도 2권이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오거나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기존의 가치관을 전부 버리는 사람은 없다.
많은 부분 수정해도 그건 수정이거나 그 후의 발전이지
이전의 생각 자체를 버리진 않는다.
계속 나오는 책은 지겹지 않다. 배울것도 많다.
사람을 읽는다는 건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책보다 훨씬 재밌지만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든다.
내 상태를 책으로 비유하면 1권의 내용이
2권에서 더욱 강한 확신과 표현으로 바뀌고 있다.
내가 독자라면 이런 책은 지루하진 않아도
점점 거부감이 들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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